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 (문단 편집) == [[발키리 작전]]의 발동, 뒤이은 [[쿠데타]] == 베를린의 보충군 사령부는 발키리 작전을 발동할지 여부를 놓고 고심을 거듭했다. 슈타우펜베르크와 연락을 취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히틀러가 살아 있다고 연락한 펠기벨 장군이 전한 소식도 단편적인 것이라서 확실한 판단을 내리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결국 이들은 슈타우펜베르크가 베를린에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결정했는데 이것이 암살시도와 쿠데타를 실패로 이끈 결정적인 순간이 되어 버렸다. 그러던 중 오후 3시 45분 슈타우펜베르크가 베를린에 도착하여 폭발 성공을 보고했다. 곧이어 '[[슈츠슈타펠|친위대]]가 반란을 일으켜 총통을 암살했다'라는 위조된 군령에 의해 발키리 작전이 발동했고, 친위대 사령부가 봉쇄되었다. 올브리히트 장군은 [[프리드리히 프롬|프롬]] 장군에게 보충군의 동원을 요구했지만, 쿠데타 가담 여부를 그 때까지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던 프롬 장군은 올브리히트 장군에게 총통이 죽었다는 증거를 대라고 말했다. 그런데 마침 늑대 소굴의 통신선이 복구되어 [[빌헬름 카이텔|카이텔]] 원수로부터 히틀러가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프롬 장군은 쿠데타 모의에서 손을 떼기로 결심하고 상황이 틀어졌다는 것을 직감한 올브리히트 장군은 일단 도망쳤다. 오후 5시, 늑대 소굴에서는 통신선이 복구되고 올브리히트 장군이 각 군에 발신한 발키리 작전 발동의 통신이 접수되었다. 그와 함께 각처의 반란 소식들이 히틀러에게 보고되자 히틀러는 이 암살사건이 슈타우펜베르크의 단독 범행이 아니라 그 뒤에 거대한 배후가 있음을 직감하고 [[장검의 밤]] 사건(Nacht der langen Messer)[* 1934년 6월 30일 히틀러가 나치 돌격대(SA;Sturmabteilung) 참모장 [[에른스트 룀]] 및 돌격대 내 반히틀러 조직을 반역죄로 몰아 숙청한 사건. 자세한 사항은 에른스트 룀 항목 참조.]보다 더한 복수를 하겠다고 다짐한다. [youtube(3iojQ6Ao5WA)] [[작전명 발키리|작전명 발키리]]의 한장면. 오후 4시 30분, [[베를린]]에 도착한 베크 장군, 올브리히트 장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은 행동을 개시하고 프롬 장군에게 다시 찾아가 쿠데타에 가담할 것을 촉구했다가 발키리 작전의 발동을 알고 분개해 자신들을 체포하려는 프롬 장군을 그대로 체포했다. 오후 5시, 슈타우펜베르크를 체포하러 온 [[슈츠슈타펠|친위대]] 장병들이 오히려 역으로 체포되고, 반나치 병력이 행동을 개시해 베를린에 있던 나치 당 고급 관료들을 체포했다. 오후 6시에는 쿠데타 세력의 명령에 따르던 육군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군사)|사단]] [[수도(행정구역)|수도]]경비[[대대]] 예하 병력들이 친위대와 보안국 사령부를 점령하기 위해 부대를 이동시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